명품아파트와 벌목.

제가 사는 아파트는 약 30년이 다 되어가는 곳입니다. IMF 직전에 입주했으니 만 25년을 산 곳입니다. 아마 이곳 저곳 이사를 다녔다면 부동산으로 돈을 좀 벌었을듯 한데, 워낙 재테크에 문외한 이다보니 제 복은 아니라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한가지 위안이라면 오래 된 아파트라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 경치도 좋고 한여름에는 그늘이 있어 시원하다는 점입니다. 물론 여름철 매미 소리가 시끄럽긴 하지만요.
최근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에서 오래된 나무를 벌목하고자 하는 주민투표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단지내 심어진 30년된 메타쉐카이어 33그루를 전부 벌목하고, 팽나무 고목 몇 그루를 벌목하자는 사안인데요. 낙엽으로 인한 하수관 막힘의 피해, 뿌리가 보도불록을 밀어 올려 보행자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문제, 태풍으로 나무가 쓰러지게 되면 주차 된 자동차 등에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유를 들어 찬반투표를 진행하고 있는데, 그 과정을 보면 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첫째, 주민투표를 공지하는 안내문에 벌목으로 인한 장점 또는 당위성 만을 안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모든 사안에는 장점과 단점이 모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나무로 인한 장점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 언급도 없습니다.
둘째, 공사를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발생되는 비용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30미터에 이르는 큰 나무를 베어내기 위해서는 고소 사다리차 등의 장비가 동원되어야 하고, 밑둥을 잘라 통째로 잘라내면 그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게 되니 위에서부터 순차적으로 벌목 작업을 하게 되어 인건비 등 비용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비용은 입주민들이 낸 장기수선충담금에서 사용될 터인데, 이에 대한 비용발생 문제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이, 그냥 벌목에 대해 찬성/반대 만을 묻는 투표를 실시하겠다는데 문제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새로 출범한 아파트 입주자회의 대표분들은 ‘명품 아파트’를 지향한다고 합니다. 작년 하반기에는 출입구 출입 차단기를 설치하고, 경비원분들을 해고(용역 해지했으니 해고나 마찬가지)하고 전문경비업체로 변경했습니다. 저야 반대를 했습니다만 80%에 이르는 입주민들의 동의로 진행되었죠. 여기서 과연 명품 아파트가 어떤 곳인가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잘 지어지고 삐까뻔쩍한 아파트가 명품 아파트인지? 아님 다른 신축 아파트에는 없는 잘 가꾸어진 나무들이 있고 사람 사는 맛이 있는 아파트가 명품아파트인지에 대해서요.
얼마전 고래잡이로 유명했던 장생포에서 일제시대에 심은 110년된 노거수 수 십 그루를 민원이 발생한다는 이유로 베어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먼 곳이라 사진으로만 접했는데, 밑둥이 잘려 흔적만 남은 모습은 결코 아름답지 않더군요.
나무를 심어 제대로 키우는데 최소 30년이란 세월이 걸립니다. 자르는데는 하루 반나절도 걸리지 않구요.
전 우리 아파트 나무를 벌목하는데 찬성하지 않습니다. 주민투표를 통해 다수결에 따르는게 민주적인 방식임은 분명하지만, 투표전 공지 과정에서 제대로 된 공지가 되지 않은 투표실시는, 행위허가 신청을 위한 절차만을 충족시키려는 불순한 의도라는 생각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명품 아파트는
1. 나무가 풍성하게 자라고,
2. 쓰레기를 아무데나 버리지 않는 곳,
3. 재활용품 분리수거를 깔끔하게 하는 곳,
4. 이웃들이 마주치면 반갑게 서로 인사를 나누는 곳, 아프리카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말처럼, 이웃의 자녀들을 내 조카처럼 생각하고 챙겨주는 곳이 명품 아파트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벌목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가 시작된다는 날, 비오는 아침의 단상입니다.